'몇가지방법'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08.02.13 :: 당장 인생을 바꾸는 7가지 아이디어
  2. 2008.02.12 :: Fun Fun하게 사는 7가지 습관
  3. 2008.02.11 :: 세상을 바꾼_ 역사적인 사진들
몇가지방법 2008. 2. 13. 21:20


# 1。 결론으로 점프하지 말라.


 


일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성급하게 결론짓는 게 사람의 습성이다.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할지 미리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쉽다.


그러나 우리의 ‘예측’은 대부분 틀리기 마련이다.


성급한 예측이 일과 사람 관계를 망친다.






# 2。 드라마를 만들지 말라.


 


상황을 극적으로 꾸미지 말라는 말이다.


엄청난 위험이 오고 있다는 상상,


대단한 행운이 일어날 것이라는 상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영화 속에 살고 있지 않다.






# 3。 규칙을 발명하지 말라.


 


"반드시 이래야 한다" 따위의 규칙을 습관적으로 만들어 주장 할수록


당신은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주위 사람은 피곤하다.


정해진 일반적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규칙 제정자의 습관을 버리는 것이 이롭다.






# 4。 완벽한 무엇을 찾지 말라.


 


인생은 ‘전부/전무’, 혹은 ‘흑/백’의 게임이 아니다.


완벽한 직업을 찾다보면 실업 상태가 길어지고


완전한 인간관계만 찾아다니면 외로워진다.


완벽주의는 당신의 기쁨을 망치고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만 키운다.






# 5。 일반화를 피하라.


 


한 번의 실수가 완전한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한두 번 작은 승리를 이뤘다고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 6。 내 감정은 가짜다.


 


많은 경우 사람의 감정은 가짜다.


우리의 감정이 실제 상황을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감정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실제 상황도 나쁘다고 등치해서는 안 된다.


배고프거나 피곤하거나 짜증이 나면 부정확한 감정을 갖게 된다.


내 감정을 진실한 것으로 믿으면, 오판을 하게 될 위험이 크다.






# 7。 과거에 집착 말라.


 


너무 흔한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대부분의 분노와 좌절과 절망은 현재의 문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와 문제에 집착하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과거의 아픔과 싸우려 들지 말고 내버려 두자.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posted by 포크다이너
:
몇가지방법 2008. 2. 12.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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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인 중 25%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통계가 있다. 시간에 쫓기는 한국인들은 좀처럼 여유가 없어 피로와 스트레스조차 제대로 풀지 못한다. 이렇게 어둡고 지루한 일상을 어떻게 전복할 수 있을까.

여기, “인생의 목표가 재미있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재미는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우울·권태·무기력을 극복하게 해주는 묘약이다. ‘주간동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재미주의자’들을 만나 그들의 특별한 생활습관을 추려보았다.

인생이 따분하다고? 다음의 일곱 가지 덕목을 따라 해보자. 우리 인생도 한층 생기발랄하게 변모할 것이다.

1. 발상 전환으로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킨다

긍정심리학 전도사인 한국심리상담연구소 김인자(75·서강대 명예교수) 소장. 그의 장기는 골치 아프고 짜증나는 상황을 유머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인생의 재미란 긍정적인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는 게 김 소장의 지론이다.

“차를 타고 가는데 길이 막히면 짜증나게 마련이죠. 그런데 화를 낸다고 막힌 길이 뚫리나요? 저는 그럴 때마다 입꼬리에 두 손가락을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들거나 마주 오는 상대편 운전자에게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를 건네요. 그러면 찌푸린 표정의 상대방도 금방 미소를 짓습니다.”

창의성과 위트는 재미있는 인생을 살기 위한 필수요소다. 언젠가 아파트 복도에서 키우던 3개의 난 화분을 도둑맞았을 때, 김 소장은 독특한 해결책으로 문제상황을 돌파했다. 큰 종이에 눈동자를 크게 그리고 속눈썹까지 예쁘게 그려 넣은 뒤 밑에다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수십 년 동안 키워오신 화분을 요즘 누가 자꾸 가져가요. 화초들이 그 집에 가서도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김 소장이 이 그림을 복도 벽에 붙여놓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잃어버린 화분 때문에 우울했던 그의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화분도 더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 소장은 “즐겁지 않은 일도 즐겁게 만드는 ‘마음의 마법’을 부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대중목욕탕에서 남들이 어질러놓은 물건을 치우며, 그는 ‘자식들에게 훗날 도움이 될 일’이라고 여긴다. 차가 고장나 먼 길을 걸어야 할 땐, ‘안 그래도 운동이 부족했는데 잘됐다’고 마음의 자세를 바꾼다. 소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그는 잠시도 우울할 틈이 없다.

“진정한 재미는 일시적·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성취감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긍정심리학의 대가인 마틴 셀리그만이 ‘아이스크림의 첫맛은 달콤하지만 먹다 보면 덤덤해진다’고 했잖아요. 감각적 쾌락은 순간이지만, 행복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재미는 영원합니다.”

2. 놀 듯이 일하고, 일하듯 논다

“If it is not fun, why do it?”(재미없는데 왜 해?)

‘유희적 인간’을 표방하는 방송인 노홍철(28)의 인생 모토다. 중·고교 시절부터 다른 친구들의 호출기에 재미난 멘트를 녹음해주고 돈을 벌었던 그는 ‘티나게 잘 놀아서’ 방송계에까지 진출했다.

취미생활을 갖는 건 재미있게 사는 필수조건이다.

노홍철은 연예계 데뷔 전 ‘꿈과 모험의 홍철동산’이란 인터넷 쇼핑몰을 열어 파티용품을 수입 판매했고, ‘플레이 매니저’를 자청하며 사람들의 심리상담까지 했다. 이어 중국 여행사 ‘홍철투어’를 설립, 여행사업에서도 대박을 터뜨렸다. 취미로 시작한 일에서 짭짤한 소득까지 올린 그는 자신의 엽기발랄한 놀이문화를 하나의 산업으로 승화시켰다.

노홍철은 그의 끼를 눈여겨본 케이블TV 관계자에게 발탁돼 방송일을 시작했고 이후 VJ, 모델, 진행자로 거침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좋아~ 가는 거야!”라는 경쾌한 외침과 함께.

남보다 세 배 빠른 속도로 말하고, 이토록 다양한 일을 섭렵한 그가 좀처럼 지치지 않는 이유는 일을 놀이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이 아니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일로 다가오지 않거든요.”

3. 음악과 춤, 예술을 벗삼는다

안경종합유통업체인 시호비전그룹(옛 한국옵티그마)의 김태옥 회장은 ‘춤바람난 CEO’로 통한다. 지난 10여 년간 매주 한두 번씩 서울 청담동의 한 댄스바에서 아내와 함께 스포츠댄스를 연습해왔기 때문. 왈츠는 물론 룸바, 자이브, 차차차까지 거의 모든 춤을 마스터했다.

“10여 년 전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갔는데, 매일 밤 댄스파티가 벌어졌어요. 거기서 부부와 연인끼리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데 한국 사람들은 술잔만 기울이는 거예요. 파티장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싫어 한국에 오자마자 댄스학원에 등록했죠.”

김 회장은 스포츠댄스를 하며 건강을 지킨 것은 물론, 부부금실까지 좋아졌다고 한다. 스포츠댄스는 아내와 손을 두 시간 넘게 잡게 해주는 고마운 운동이라는 것. 태권도 공인 9단에 골프 실력도 수준급인 그는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고 강조한다. 잘 노는 사람일수록 끼와 에너지가 풍부하고, 창의성이 넘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기업 경영에서도 재미를 화두로 던진다. 신년회를 열 땐 사원들과 함께 ‘오페라’를 보고, 사원들에게 스포츠 클럽에서 그룹 미팅을 하도록 제안하기도 한다. ‘회사가 재미있으면 일의 효율도 오른다’는 것을 그는 피부로 느낀다고 한다.

사회복지법인 ‘평안의 집’의 이은경(67) 이사장은 사회복지사업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가미한 선구자다. ‘평안의 집’은 무의탁 노인들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 성가대 지휘자로 활약한 이 이사장은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살려 ‘무의탁 노인 돕기 자선음악회-사랑이 머무는 곳에’를 8회째 진행해왔다.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 음악회에는 경기도립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유명 성악가와 가수가 등장했다.

“외롭게 사시는 어르신들과 후원자가 함께 음악을 즐기는 이벤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지 몰라요. 예술의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면 재미는 배가 됩니다.”

4.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시호비전그룹 김태옥 대표, 사회복지법인 ‘평안의 집’ 이은경 이사장, 한국심리상담연구소 김인자 소장(왼쪽부터).

재미있게 살기 위해선 일단 부지런하고 볼 일이다. ‘노력파 연예인’으로 손꼽히는 MC 박경림(28)은 “도전정신이야말로 재미있게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말한다.

“연예인도 매일 방송국과 집을 오가는 비슷한 일상을 반복해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려면 새로운 일을 과감하게 시도해봐야죠.”

그의 연예계 생활은 도전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공한 여자연예인은 모두 예쁘다’는 공식을 깨며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연예계에 등장했다. 유달리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우려도 있었지만 그는 보란 듯이 음반을 발표해 성공을 거뒀다. 인기 정상에서 홀연히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두둑한 배짱 덕분이었다.

최근 박경림은 6개월 전 개설한 인터넷 의류쇼핑몰 ‘뉴욕스토리’의 CEO로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서울 홍익대 근처에 분식집 ‘밥톨’s’를 열기도 했다. 숭실대 PB학과 대학원에 다니며 경제지식도 쌓고 있는 그는 “모르는 것을 알아나가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분식집을 낸 건 저렴한 음식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정기적으로 결식 아동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계획입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지만, 함께 밥을 먹으며 잔정을 나누는 재미만큼 가슴 훈훈한 게 없어요.”

5. 경쟁과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롭다

국내 ‘재미(fun) 철학’의 선구자로 통하는 손대현(61) 한양대 국제관광대학원 최고엔터테인먼트과정 원장. 그는 20년 넘게 관광학과 교수로 지내다 2001년 가을 국내 대학원에 처음으로 최고엔터테인먼트과정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리더십이나 경영학을 가르쳤다면 그는 재미있고 신나는 일들이 무엇인지 연구한 것.

손 원장은 인생의 재미를 위협하는 요소로 자본주의를 꼽는다. 강자의 논리를 내세우며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는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광고 대행사가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아파도 쉬지 못한다고 합니다. 늘 바쁘다는 생각에 물리적·심리적으로 여유를 찾지 못하는 거죠.”

손 원장은 재미를 누리기 위해 시간의 속박과 물질의 유혹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의 연구실 시계는 특이하게도 시곗바늘이 없다. 시간은 원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없어서 못 논다’고 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해요. 시간이 나면 즐기겠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를 즐기는 게 진정으로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법입니다.”

자본주의 시대,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손 원장은 돈과 물질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편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버둥거릴수록 우리 삶이 돈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 순간 ‘일을 좀더 해서 돈을 더 많이 벌걸’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돈은 재미있게 살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는 학기 중 하루 이틀 정도는 사람·신문·대중매체와 완전히 단절된 채 고독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한다.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길로 집에 간다든지 갑자기 ‘번개팅’을 주도해 즉흥적 재미를 맛보기도 한다. “재미도 노력해야 얻어진다”는 그는 ‘일생감동, 일생청춘’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6. 폭넓은 사교활동을 즐긴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 중에는 긍정적 의미의 ‘오지라퍼’(오지랖이 넓은 사람)가 많다. 타인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하는 일을 즐기는 것.

김태옥 시호비전그룹 회장은 ‘경제계 마당발’이다.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고려대 최고경영자 과정(AMP),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과정, 순천향대 건강과학 최고경영자 과정 등 그가 졸업한 대학원 과정만 10여 개. 그는 여러 개 대학원의 동문회장을 도맡아 하며 경제계, 언론계, 법조계, 패션계, 음악계 등 각계각층 인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겁습니다. 안경산업의 특성상 패션감각을 익히고 젊은 층의 트렌드를 따라가야 하는데, 다른 분야의 인사들을 사귐으로써 늘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를 들어요. 반대로 평생 공부만 해온 교수나 일에만 몰두하는 사업가에게 잘 어울릴 법한 안경을 선물해 스타일 변신을 돕는 건 저의 기쁨이고요. 폭넓은 인맥을 만들면 재미있는 일이 동시다발로 생깁니다.”

‘연예계 마당발’ 박경림 역시 부지런한 인맥관리로 삶의 재미를 찾는다. 그는 이문세 김장훈 박수홍 등 선배 연예인부터 이수영 이효리 등 동갑내기 연예인 친구들까지 나이·성별을 불문하고 막역한 사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의 인맥은 연예계에 그치지 않는다.

“보험회사 다니는 친구, 옷장사 하는 친구, 기자로 일하는 친구….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내가 모르던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게 돼요. 사람들 모두 치열하게 산다는 걸 깨닫게 되고요. 잠을 좀 덜 자더라도 짬을 내서 친구들에게 항상 연락을 합니다.”

7. 항상 웃는다

한국심리상담연구소 김인자 소장은 밝은 정서를 지니려면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웃으라”고 조언한다. 웃음은 엔도르핀을 활성화해 병을 막아주고, 뇌 발달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웃음으로 시작하면 하루 일이 잘 풀리게 마련이다.

“매일 아침 대중목욕탕에 가면, 저는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해요. 그런데 한동안 다른 일정 때문에 목욕탕을 가지 못하면, 제 유쾌 바이러스에 중독된 다른 손님들이 저를 무척 그리워한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웃음은 금세 전염이 되거든요.”

posted by 포크다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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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방법 2008. 2. 11. 22:44






1936년에 캘리포니아 이주 농민들의 생활과 그 상태를 기록한 도로시아 랭의 '이주노동자 어머니'



혁명정부 기관지인 (혁명)지 기자로 활동하던 1960년 3월 쿠바 아바나 광장에서 찍은 알베르토 코르다 '체 게바라'



1968년에 베트남군 장성이 베트콩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장면을 포착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에디 애덤스의 '사이공의 즉결 처형'



제프 와이드너의 '베이징 대학살-톈안먼 사건 당시 창안대로로 진입하는 탱크를 가로막고 서 있는 청년'



1973년 베트남전의 참상을 세계에 알려 퓰리쳐상을 수상한 닉 우트의 '네이팜탄 투하 - 네이팜탄을 피해 달리는 사이공 아이들'



닐 암스트롱의 '인류 최초의 달 착륙'



1936년 스페인 내란중에 찍은 로버트 카파의 '어느 병사의 죽음'



찰스 황태자와 다이에나 왕비_ '왕가의 결혼'.



안드레아스 스프링거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샘 셰어의 '힌덴부르크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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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기, 미국 서부 이주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기 위해 도로시아 랭은 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여자와 그녀의 아이들은 캘리포니아 완두콩을 따는 야영지의 한 텐트에 살고 있었는데, 완두콩 작황이 좋지 않아 일자리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결국 그녀와 아이들은 밭에서 얻은 얼어붙은 채소와 아이들이 잡은 새로 겨우 끼니를 연명했고, 위기에 몰린 어머니는 차의 타이어를 떼어 팔아서 먹을 것을 마련했다.


도로시아 랭은 지방 신문에 완두콩을 따는 사람들의 사진을 발표함으로써 세상의 관심을 굶주린 노동자들의 야영지로 집중시켰다. 당시 미국 농민들은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10년 전부터 이미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소작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 사진은 그 후 인간의 고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유명해졌다.


사진 출처_밀턴 멜처, <도로시아 랭-어느 사진작가의 인생>, 뉴욕, 1978



..일본 공군기지 부지인 이오지마는 1945년 초기에 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연합군은 그 섬을 점령해 일본을 폭격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일본군은 그 섬의 화산암에 지하 요새를 만들어 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벌어진 몇몇 치열한 전투에서 2만 명 이상의 일본인과 7천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사망했다. 연합통신사의 사진기자인 조 로젠솔은 1945년 2월 23일 미군이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찍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당시 미국 해병대는 섬에 있는 스리바치 산을 점령하고 커다란 깃발을 세웠는데, 얼굴을 알 수 없는 사진 속 군인들의 협동 작업과성조기 게양이 상징하는 승리의 의미는 전쟁 막바지의 힘겨운 몇 달 동안 미국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사진 출처_비키 골드버그, <사진의 힘-사진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었는가>, 뉴욕, 1991 제임스 브래들리, 론 파워스,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 뉴욕, 2000



 


1953년 6월 2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여왕은 보석이 장식된 왕관을 쓰고, 군주정치의 상징인 보주와 왕홀을 들고 있으며, 6명의 궁녀들이 모피를 두른 여왕의 자줏빛 벨벳 옷자락을 들고 간다. 신과 국민을 위한 봉사에 헌신하는 대관식의 본질적 의미는 천 년이 넘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엄연히 20세기 중반의 분위기를 띠었다는 것. 전시 통제는 줄어들었고 런던 중앙을 통과하는 길에서는 영국 국민 50만여 명이 황금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여왕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한 대관식과 함께 베일에 싸여 있던 왕족의 모습이 반나절 동안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공개되었는데, 덕분에 2천7백만 영국 국민은 물론 서부 유럽과 북미 사람들까지 대관식을 관람할 수 있었다. 50여 년이 넘도록 영국 여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사진은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출처_벤 핌롯, <여왕-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 런던, 1997




..더벅머리에 정장 차림을 한 리버풀 출신의 네 남자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존 레넌. 1963년 비틀즈가 <Please please me>를 발표한 후 영국은 비틀마니아가 휩쓸었다.


19세기 네덜란드 초상화풍의 이 단체 사진에서 대중음악계의 네 선도자는 행실이 바른 학생처럼 보인다. 똑같은 더벅머리에 교복 스타일의 재킷, 흰 셔츠, 폭이 좁은 넥타이는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행복하고 편안해 보인다. 비틀즈만큼 신선하고 편안한 음악으로 전후의 음악과 사회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밴드는

없었다. 비틀즈팬들이 보인 병적인 흥분과 도취, 일명 비틀마니아는 시대적인 현상이었다. 보수적인 사회를 깜짝 놀라게 한 광적인 히스테리는 이제 대중음악과 로큰롤 계에서 일반적인 현상이 되기도 했다. 초기의 성공으로 비틀즈는 그룹 이미지를 파는 기술을 금세 익혔고, 개개인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난 이 초상 사진이 그 점을 증명해준다. 1970년 밴드가 해체된 후에도 그들의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진 출처_마크 허츠가드, <일생의 하루-비틀스의 음악과 예술성>, 뉴욕, 1995

..1963년 3월 28일, 흑인의 인권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한 20만여 명이 링컨 기념관 앞 광장과 그 옆길까지 가득 메우고 있다. 침묵을 명하며 오른손을 든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은 왼손에 원고를 들고 연단에 섰고, 이후 군중은 인종차별, 증오, 폭력이 없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담은 그의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귀 기울여 듣는다. 억압받는 미국 흑인들 편에 서서 인종차별주의에 항거하고 평등과 관용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적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몽고메리에서 비폭력 시위를 이끈 후 집이 불타는 등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시위와 행진에 참여하여 대담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되풀이되는 구속, 흑인 침례교도들의 저항, 신나치주의자와 KKK단 회원이 주도한 백인 폭력배들의 무장 위협이 이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비폭력의 원칙을 고수했다.

사진 출처_마틴 루터 킹 주니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1993

..1969년 7월 16일, 마이클 콜린스, 에드윈 올드린, 닐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를 타고 케이프케네디 발사장을 떠났다. 그리고 7월 20일, 올드린과 암스트롱은 착륙선에서 내려 달을 밟은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달 표면에 서 있는 올드린과 그가 쓰고 있는 헬멧의 보호 유리에 비친 닐 암스트롱을 담은 이 사진은 행성을 보는 인류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고, 그것은 1960년대의 우주에 대한 환상을 완성했다.


인간이 달을 밟았다는 유일한 증거는 사진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진이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고, 미국 항공우주국의 달 탐사 목적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아폴로 11호와 그 이후의 우주비행이 선전 활동의 일환이며 이와 같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음이 명확해졌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사진은 인간의 우주 비행에 희망을 담은 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

사진 출처_앤드루 차이킨, <달 위의 인간>, 뉴욕, 1994

..1969년 11월 10일, 동독은 기습적으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간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곧이어 엄청난 인파가 브란텐부르크 문이 보이는 서독 진영에 몰려들어 축하의 환호성을 보낸다. 브란덴부르크 문의 위와 아치 앞에는 아직도 소련과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러나 벽주위와 꼭대기에서 군중은 떼를 지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그 위협적인 장벽은 혼란스럽고 열의 넘치는 인간 벽으로 바뀐다.
 
동독과 서독의 통합을 상징하는 더할 나위 없는 이미지다. 안드레아스 스프링거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현장에서 맞이하기 위해 밤을 새워 달려온 사람들을 찍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개봉되고, 온갖 색깔의 낙서로 가득한 장벽은 깨지고 팔리고 경매에 부쳐지고 땅에 뭍혔다. 도시 전체가 흥분으로 들썩였고, 그 어떤것도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순간은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진 출처_페터 슈나이더, <장벽을 뛰어넘어-베를린 이야기>, 시카고.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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