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미국 볼티모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대 주머니에 있었던 것은 겨우 단돈 200달러였다.
20대 후반의 도전은 무모해보였다.
"미국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잘 사는 것일까?"
" 그래 이 궁금증만 풀리면 돌아온다. 길어야 3년이겠지"
청년은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 사정처럼 초라하다.
1차 오일쇼크로 강대국인 미국도 휘청거리고 있던 때
괜찮은 직업을 얻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꿈이었다.
지금 현실과 비슷하다.
그가 들어간 건설자재회사는 이듬해인 오일쇼크를 못견뎌 문을 닫고 말았다.
실업자가 되어 찾아 간 곳은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이었다.
그 곳의 철야근무는 항상 자리가 있었다.
밤 11시서부터 아침 7시까지 철야근무는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생각과 달리 미국의 점포 운영구조는 한마디로 한심했다.
근무자는 8시간씩 3명인데 금액, 판매량, 재고 등 개인들의 교대시간별 업무의 전달은 전혀 없고
24시간 단위보고만 이뤄지고 있었다.
중간에서 문제가 생겨도 누가 책임져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밤새 열심히 일했는데 앞사람의 잘못으로 돈이 비게 돼도 괜히 청년이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
8시간 단위 보고서 작성 아이디어를 건의했고, 이는 곧바로 채택됐다.
점포의 수익성이 나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 청년은 단지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그에겐 이 일자리라도 감지 덕지였던 것이다.
얼마후 그가 제안한 강도예방책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줬다.
당시 세븐일레븐은 24시간 영업하는 거의 유일한 점포였기 때문에 강도들의 주 표적이 됐다.
6000여 점포 중 하루평균 1.5곳이 털리고 있었다.
강도가 들어오는 것은 현금이 많이 있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점장에게 우리 점포의 계산대 앞부분을 외부에서 유리창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고,
밤 11시 이후에는 잔돈 19.99달러만 남기고 모두 회수하자고 제안했다.
현금을 늘리지 않기 위해 20달러 이상 제품은 팔지도 않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우리나라 은행들이 지금도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만든 게 이해되지 않는다. 강도 들어오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븐일레븐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지난 어느날 본사에서 임원이 그를 찾아와 격려했다. 그리고 점포 부점장이 됐다.
다시 3개월 뒤에는 점장 발령이 났다. 전례가 없던 초고속 승진이었다.“나는 영어도 아직 서툰데.”
처음 점장으로 간 곳은 메릴랜드주 고속도로변에 있는 5000평 규모의 대형 휴게소 점포. 대형 트레일러 운전사들이 주고객이었다.
그러나 투자는 어마어마하게 했는데 만년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손님 모을 방법을 고안했다.
“커피는 5분 뒤, 핫도그는 20분 뒤에 오시면 가장 맛있는 상태로 드실 수 있습니다.”
무선통신 라디오로 밤새 트럭 운전사들을 상대로 안내방송을 했다.
수십개의 바퀴가 달린 대형트럭 운전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6개월 뒤 이 골칫덩어리 점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월 2만 5000잔의 커피를 파는 곳이 됐다.
세븐일레븐의 지역 책임자가 되고 나서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 있던 1985년.
아이스크림전문점 배스킨라빈스에서 그를 찾아왔다. 한국시장에 진출한다고 했다.
10여년 만에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미국에 갈 때는 말단점원이었지만 이번에는 CEO였다.
이듬해 8월 서울 명동에 1호점을 열었다. 실평수 12평에 좌석은 고작 22개. 미국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도 앉을 자리가 없다며 되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뭔가 먹을 때는 반드시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한국적 사고 때문이었다.
게다가 10,11월 들어 찬바람이 불자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전 직원을 동원해 아이스크림컵과 숟가락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눈 내릴 때 나가는 게 중요했다.
눈발 날리는 데서도 먹을 수 있는 게 우리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야 했다.
공장직원들도 절대 공짜로 못 먹게 했다.
대신 가족, 친구를 데리고 점포로 찾아가 밖에 나가 들고 먹는다는 조건 하에 공짜로 줬다.
그해 겨울이 지나니까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니며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의 소비성향은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식이다. 외식산업이나 패션산업도 마찬가지다.
‘황새’가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먹고 다니면 ‘뱁새’도 따라한다.
하지만 누구도 황새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모르모트가 돼서 창피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황새 노릇을 해주었던 것이다.
1999년 스타벅스커피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당시 패스트푸드 '파파이스' 아시아지역 대표로 있던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스타벅스는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그가 스타벅스 대표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본사에서 그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는 말이 돌았다.
서울 이화여대점은 3층, 대학로점은 100평 등 모든 점포를 대형으로 꾸몄기 때문이다. 5층짜리 명동점은 전세계 최대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커피를 들고 다니며 마시고, 점심시간 개념도 뚜렷하지 않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커피를 마시며 앉아 대화할 곳을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점포를 초대형으로 했는데도 좌석이 모자랐다.
1999년 7월 초기에 음식을 들고 나가는 테이크아웃은 고작 3%에 불과했다. 95%가 테이크아웃인 미국과 정반대였다.
나중에 미국의 뉴스전문방송 CNN은 3분 동안 스타벅스 명동점을 소개하며 한국의 특수한 문화를 설명하기도 했다.
2003년 CJ그룹이 전 스타벅스커피코리아 사장을 식품서비스부문 총괄대표로 영입했을 때 업계의 긴장은 대단했다.
1970년대 중반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불과 반년 만에 대형편의점 세븐일레븐의 말단점원에서 점장으로 뛰어 올랐고
아이스크림전문점 배스킨라빈스와 패스트푸드점 파파이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를 한국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인물.
특히 스타벅스커피코리아는 그가 있을 때 스타벅스가 진출한 전세계 28개국 중 최단기간에 흑자를 달성한 것은
물론 점포당 평균 매출액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이제 빕스, 스카이락, 한쿡, 뚜레쥬르, 델쿠치나, 더시젠 등 CJ그룹의 6개 외식사업 브랜드를 초일류로 키우라는 특명이
2005년이면 환갑을 맞는 정진구(鄭鎭九·59)에게 떨어졌다.
한 청년이 아르바이트 점원에서 시작해서 CEO까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일을 재미있게 했다는 것과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비자의 패턴을 읽고 앞서가는 눈이 그에게 있었고, 그것을 생각만이 아닌, 실천할 수 있었던 추진력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아르바이트 점원에서 시작해서 CEO까지 오른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나도언젠가 성공할꺼야!!!